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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슬기사람

문장연습, 2003년 4월 중순 어느날 꿨던 무서운 꿈.


 

푸미

                                                                            

  나는 그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들이켜고 몽롱한 정신으로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갔다. 그날(자정이 넘었으니)까지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를 한 글자로 안 쓴 채로 제대로 씻지도 않고 자리에 누운 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초토화 되어있었다.


  나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운동장 한 가운데에 서있다. 동이 터 오는 가운데 주위에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운동장은 고요하다. 원래 세상에 소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적막만이 흐른다. 내 옆에선 젖먹이 때부터 키운 애완견 푸미가 내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다. 푸미는 신이 나는지 폴짝폴짝 뛰며 이따금 앞발로 내 다리를 건드리곤 한다. 그러나 푸미가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열 살-인간 나이로 치면 쉰-이 넘은 푸미가 저렇게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한참동안 내 주위에서 뛰어다니던 푸미는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싫증이 났는지 발길을 돌려 학교 후문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하는 푸미를 보고 있자니 앞으로 가끔 이 곳에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푸미가 너무 멀리 가는 것 같아서 불러 세우려고 “푸미야!” 라고 외쳤는데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푸미에게도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푸미는 계속해서 후문 방향으로 달음질친다. 나는 푸미를 잡으려고 뒤쫓아 간다. 내가 헐레벌떡 학교 후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디에도 푸미는 없다. 목이 터져라 푸미를 불러보지만 여전히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푸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옥상이다. 요즘 새로 짓는 아파트와는 달리 옥상이 평평하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올라올 수 있다. 중앙에 엘리베이터 기계실과 좌우에 피뢰침, 그리고 듬성듬성 있는 환풍구만 제외하면 가장자리에 높이 90센티 정도의 두꺼운 시멘트 난간이 있는 축구 경기장 한개 만큼 넓이의 공터다. 차와 사람들의 방해 없이 안전하게 개를 산책시킬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개를 데리고 올라온다. 나도 푸미를 데리고 가끔 옥상에 올라온다. 푸미는 이곳이 질리지도 않는지 올라올 때마다 마치 구역 관리하는 조직폭력배처럼 옥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일몰과 함께 하늘이 어둑해지는 가운데 나는 푸미가 자유롭게 뛰놀 수 있도록 목줄을 풀어주고 피뢰침 아래쪽에 네모나게 튀어나온 콘크리트 위에 걸터앉았다. 일몰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푸미가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신나서 지르는 환호성이 아니라 적을 위협하는 소리다. 가끔 옥상에 다른 개가 올라와서 푸미가 그 개와 대치하며 짖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다. 서둘러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어간다.

  옥상에 올라온 개는 없었다. 푸미는 그냥 허공에 대고 미친 듯이 짖으며 뛰어다니고 있다. “땍! 짖지 마!” 라는 나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푸미는 짖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일단 푸미를 잡아서 조용히 시킬 생각으로 푸미에게 다가간다. 푸미는 나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가다가 끝내 궁지에 몰리자 난간을 뛰어넘는다. “어?” 믿기지 않게도 작은 말티즈종 푸미는 자신의 키의 대여섯 배가 넘는 난간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난간을 넘으면 80미터 아래 지상으로 추락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깜짝 놀라서 푸미가 뛰어넘은 난간에 기대서 아래를 내려다보려고 고개를 난간 너머로 내민다. 그 순간 아래쪽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큰 폭발이 일어나고, 나는 폭발력에 밀려서 뒤로 십 미터쯤 날아가서 나동그라진다. 폭발이 어찌나 컸던지 차량의 헤드라이트 조각과 찌그러진 보닛 같은 파편들이 80미터를 날아 올라와서 쓰러진 내 옆에 떨어진다. 다행히 나에게 정면으로 떨어진 파편은 없었고, 콘크리트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 치고는 몸도 그다지 아프지 않다. 나는 폭발의 원인이 궁금해서 난간으로 다가가 다시 고개를 내민다.


  잠에서 깼다. 내 방이다. 창문을 보니 아직 한밤이다. 자정이 넘어서 잠들었는데 해 뜨기 전에 일어나다니, 내 무의식이 판단하기에 어지간히 악몽이었나 보다. 생각해보면 상황 자체가 애초에 판타지였다. 그래, 처음부터 꿈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푸미는 일주일 전에 죽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꿈에서 귀신을 봤는데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실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향했다. 여름이라 방문은 삼십 센티 정도 열려 있었고, 나는 문을 당기려고 문고리를 잡았는데, 그 순간 열린 문틈 사이로 하얀 손이 불쑥 들어와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놀란 내가 뿌리치고 뒷걸음질치려고 했지만 하얀 손은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밖에서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사람은 일곱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에 장식 없는 하얀 원피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얗다 못해서 야광 같은 피부에 동그랗고 큰 눈을 가진 그녀의 모습은 전형적인 여자귀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깜깜절벽에서 그 아이의 모습이 상세히 보인 것도 신기하다. 소녀는 무표정으로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한참동안 올려다보다가 내 손목을 놔주고 말했다. 도저히 꼬마 애의 목소리 같지 않은, 무미건조하다 못해서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은 음색이었다. “너는 언제 잠들지?” 


잠에서 깼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온다. 세상에, 한밤에 잠에서 깬 것도 꿈이었구나. 온몸에 식은땀이 난다. 삼십 센티 정도 열려있는 방문을 보고 있자니 너무 무섭다. 문뜩 ‘이야기 속으로’에나 나올 법한 이 꿈 얘기를 까먹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졌다.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끝-